게임 조금 잡것 가득
Slay the Spire - 운과 전략의 절묘한 균형 본문
타이틀명 : Slay the Spire
출시일 : 2017.11.15(얼리 액세스), 2019.01.24(steam)
개발 : Mega Crit Games
플레이한 플랫폼 : PC(steam)
공식 한국어화
모든 분야가 그러하듯 게임에서도 더 이상 자신만의 새로운 장르라는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오랜 역사에 걸쳐 수많은 작품이 탄생한 만큼 과거의 작품으로부터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작품이라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기존의 장르들을 적절히 융합시켜 자신만의 개성으로 만들어내고자 하는 시도는 끊임없이 존재해왔고 이런 시도를 성공시킨 작품들이 게임 업계를 발전시켜 온 것 역시 사실이다.
최근 몇 년간 인디 게임계에 '덱 빌딩 로그라이크 장르'를 유행시킨 '슬레이 더 스파이어'는 이런 시도를 성공시킨 좋은 예시다. 랜덤 생성과 죽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로그라이크' 장르의 기본적인 특징과 카드를 모아 자신만의 덱을 만들어가는 '덱 빌딩' 장르의 특징을 적절히 합쳐낸 본 작은 그 특유의 참신함과 높은 완성도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슬레이 더 스파이어의 클리어 목표는 무척 단순명료하다. 그저 한 층씩 탑을 오르며 정상에 도착하는 것이 목표의 전부다. 그래픽도 단순하고 스토리라고 부를만한 이야기가 전혀 존재하지 않기에 게임의 첫인상은 매우 나쁠 수 있다. 하지만, 슬레이 더 스파이어는 그런 단점들이 사소하게 보일 정도로 깊이 있는 게임 플레이를 담아냈다.
게임의 전투는 기본적으로 턴제이며, 규칙은 '매직 더 개더링'이나 '하스스톤'등의 카드 게임과 매우 유사한 형식을 띄고 있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매 턴 손에 있는 카드를 버리고 덱에서 5장의 카드를 뽑아 정해진 에너지 내에서 사용하고 싶은 만큼의 카드를 사용해 적을 처치하면 된다. 이처럼 게임의 규칙이 매우 쉽고 단순하기 때문에 처음 접하는 플레이어라도 입문이 쉽다는 장점이 있다.
물론 규칙이 단순하다고 해서 게임이 쉽다는 것은 아니다. 다음 턴 적의 행동을 미리 표시해 주기 때문에 이에 맞는 전략을 짜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 적의 체력이 적다면 먼저 공격해 재빨리 전투를 끝낼 수도 있고, 체력이 많은 강적이라면 수비적으로 천천히 무찌를 수도 있다. 적에게 턴이 돌아갈 때마다 강력한 공격이나 방해 효과가 오기 때문에 공격과 수비의 밸런스를 적절히 맞추는 것이 언제나 중요하다. 거기에 슬레이 더 스파이어에서 체력을 회복하는 수단은 극도로 제한적이어서 언제나 최소한의 피해로 적을 무찌르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만 한다.
슬레이 더 스파이어에는 비교적 최근에 업데이트된 '와쳐'를 포함해 총 4명의 캐릭터가 존재하며 각 캐릭터는 전혀 다른 고유의 유물과 카드를 가지고 있다. 어떤 캐릭터를 고르냐에 따라 전투 방식이나 덱의 구성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에 사실상 전혀 다른 4개의 모드가 존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캐릭터 각자의 개성이 정말 뚜렷하기 때문에, 캐릭터를 하나씩 체험해보면서 자신의 취향에 맞는 캐릭터를 찾는 게 매우 즐겁게 느껴진다.
캐릭터를 고르고, 신비한 고래인 '니오우'에게 원하는 축복을 받고 나면 게임이 시작된다. 어떤 캐릭터로 시작하던 처음 덱은 5장의 '타격' 카드와 5장의 '수비' 카드 그리고 2장의 전용 카드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재밌는 점은 이 중 10장의 카드가 플레이어에게 주어진 일종의 패널티나 다름없다는 점이다.
타격과 수비는 모두 형편없는 성능을 가지고 있는 카드다. 따라서 이런 카드들이 10장이나 덱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원하는 카드를 뽑는 것이 당연히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런 쓸모없는 카드를 덱에서 최대한 없애면서도, 강력하고 필요한 카드만을 채워 넣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해진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자신만의 덱을 만들어나가는 '덱 빌딩'이야말로 전투보다도 더욱 중요한 슬레이 더 스파이어의 핵심 게임 플레이다.
하지만 슬레이 더 스파이어의 장르 절반은 던전 크롤류의 로그라이크를 표방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된다. 모든 맵과 이벤트 배치는 랜덤으로 구성되며, 전투 보상으로 나오는 카드와 유물 역시 랜덤이다. 게임에서 운이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거대한 나머지, 수월하게 진행되다가도 순식간에 상황이 나빠질 수 있다. '덱 빌딩'에 운이 필요한 것 역시 당연한 이치다. 50층이 넘는 탑을 오르며 끝까지 원하는 카드가 한 번도 나오지 않는 것은 물론, 최악의 상황에서는 극도로 카드를 줄인 덱에서 원하는 카드 한 장을 뽑지 못해 어이없는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특히나, 유물도 없고 타격과 수비로 대부분의 덱이 이루어진 게임 초반은 정말로 고통스럽다. 강력한 콤보는 기대조차 할 수 없고 초반에 큰 도움을 줄만한 카드나 유물이 전투 보상으로 나오지 않는다면 그저 야속하게만 느껴진다. 랜덤으로 이루어진 맵에서 체력 회복 구간은 멀게만 느껴지고 상점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카드가 나오기를 간절히 바라야만 하는 그야말로 고통스러운 구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본 작이 이루어낸 최고의 성취는 역설적이게도 이 운 요소를 성공적으로 통제시켰다는 것이다. 게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오로지 운에만 맡겨서는 게임을 진행하는게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분명히 클리어를 위해 행운이 필요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에 못지않은 전략 역시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게임의 확률을 플레이어가 최대한 통제할 수 있도록 개발진이 상당한 배려를 게임 곳곳에 넣어 놓았기 때문이다.
당장 상술했던 덱을 줄여 원하는 카드를 손쉽게 뽑도록 만드는 행위 역시 확률을 통제하도록 하는 배려의 일환이다. 상점, 유물, 이벤트를 통해 자신의 덱에서 원하는 카드를 없애는 방법이 정말 다양하게 존재한다. 카드 획득 역시 마찬가지다. 기본적으로 전투를 승리했을 때 한 장이 아닌 세 장의 카드가 제시되기 때문에, 현재의 덱과 취향에 따라 마음대로 카드를 고를 수 있다. 정 세장의 카드가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덱에 넣지 않고 보상을 포기하는 것 역시 가능하다.
맵의 배치가 랜덤인 건 사실이지만, 여러 루트가 존재하고 지도 전체를 처음부터 공개하기 때문에 랜덤 배치로 인한 불합리함 역시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진행 중간에 등장하는 상점은 카드 구입은 물론, 카드 제거, 유물, 포션 등 다양한 기능을 제공하기 때문에 모아둔 돈을 적절히 활용해 덱을 재조정하는 것 역시 중요한 전략의 일환이 된다. 이처럼 정말 다양한 부분에서 전략으로 운을 극복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본 작의 랜덤성은 불쾌감보다도 오히려 이를 극복하고자 하게 만드는 재미를 유발하는 데 성공했다.
랜덤으로 만나게 되는 이벤트들은 이러한 전략의 폭을 한층 더 넓혀준다. 본 작의 모든 선택은 사실 극도로 섬세한 손익 계산을 따르기 때문에 자신이 목표로 하는 덱 컨셉, 현재 덱에 남아있는 타격과 수비, 자신의 체력, 앞으로 필요한 유물과 카드 등을 모두 고려하며 신중한 선택을 해야만 한다. 쓸모없는 카드를 없애는 대신 비용을 지불해야 할 수도 있고, 대단히 강력한 카드를 받는 대신 체력의 절반가량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
랜덤으로 등장하는 이벤트뿐 아니라 게임에서 자주 보게 될 휴식 지역에서도 마찬가지다. 덱의 카드를 강화시킬지 아니면 강화를 포기하고 자신의 체력을 회복할지에 대한 선택이 요구된다. 이런 모든 선택이 하나씩 모이다 보면, 탑의 꼭대기에선 결국 자신만의 강력한 덱을 완성하게 되는 것이다.
탑을 오르는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그만큼 자신의 덱을 완성했을 때의 성취감은 각별하다. 사실 이 성취감이야말로 본 작이 가진 중독성의 핵심이나 다름없다. 수많은 불운과 시련을 이겨내고 완성한 덱이 세 자리 수의 강력한 데미지를 뽐내며 보스를 무찌를 때의 쾌감은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수많은 카드와 유물의 효과가 맞물려 온갖 기상천외한 콤보가 가능하기 때문에 오로지 이 콤보를 완성시키는 재미만으로 본 작을 계속 플레이하게 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술했듯 4명의 캐릭터가 전혀 다른 카드와 유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캐릭터마다 전혀 다른 콤보와 덱이 최종적으로 완성된다. 게임 특성상 주어진 변수와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덱을 구성해나가야 하기 때문에 같은 캐릭터를 플레이하더라도 매 플레이마다 전혀 다른 덱이 완성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캐릭터에 따라, 플레이에 따라, 변수에 따라 정말 무궁무진한 덱과 콤보로 클리어가 가능해 게임의 리플레이 가치가 정말 높다고 할 수 있다.
거기에 게임 자체적으로 지원하는 다양한 모드는 리플레이 가치를 더욱 높여준다. 클리어를 거듭할수록 점점 더 어려워지는 '승천 모드', 매일 다양한 제약을 가지고 클리어해야 하는 '일일 도전', 정해진 클리어 지점 없이 플레이하는 '무한 모드'까지 다양한 모드가 준비되어 있다. 특유의 중독성 있고 변수가 많은 게임 플레이와 다양한 모드 덕분에 상당한 플레이 타임이 보장된다.
슬레이 더 스파이어는 전혀 다른 두 장르를 적절히 융합시켜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어 냈을 뿐 아니라 그 자체의 완성도 역시 빼어난 작품이다. 랜덤으로 생성되는 변수와 철저한 전략성 사이에서 비교적 훌륭한 절충안을 마련했으며 플레이어를 매료시킬만한 게임 플레이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비록 빈약한 스토리와 낮은 품질의 그래픽이 아쉬울지라도, 게임을 하다 보면 그런 아쉬움마저 완전히 잊게 만들 정도로 훌륭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총평-
덱 빌딩과 로그라이크의 세련된 융합
슬레이 더 스파이어는 입문하기 매우 쉽고 간단하지만, 그 이상으로 깊이 있는 전략과 게임 플레이가 존재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컨트롤이 아닌 전략과 운을 시험하는 로그라이크 게임이 즐기고 싶은 게이머나 개성 있는 장르를 구축해낸 훌륭한 인디 게임에 흥미가 있는 게이머, 아니면 그 무엇도 상관없이 그저 재밌는 게임이 하고 싶은 게이머라면 누구나 해보길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그만큼 슬레이 더 스파이어는 중독성 있고, 매력적인 결과물이다.
스팀 리뷰 : steamcommunity.com/id/thiepriest/recommended/646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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